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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문

희미하다는 거

by 후연 2018. 11. 24.

 

이삭여뀌

 

 

 

희미하다는 거 / 채정화

 

 

 

희미하다는 건, 시원찮다는 뜻이다

똑 부러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뜻도 되겠다

경상도에선 그런 사람을 티미하다고 말한다

매사에 여물지 못한 딸을 보며 종내 지 내장까지 흘리고 다닌다고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하늘나라에서 여전히 걱정하시는 건 아닐지,

 

새 옷이라고 자랑삼아 입고 나타나면 빛바랜 헌 옷 같은 그걸

누가 새옷으로 보겠냐고 못마땅해하셨다

지금도 나는, 이쪽도 그렇다고 저쪽도 아닌, 어정쩡한 색의 옷을 선호한다

괜찮은 표현을 빌리자면 파스텔톤이라 하겠다

 

엄마의 예언은 거의 신통력에 가까웠다

심히 걱정하신 일처럼 아직, 길에 내장을 흘린 적은 없지만,

대신 정신을 한 움큼씩 줄줄 흘리고 다닌다

 

어느 땐 가족같이 지내던 지인을

전혀 낯선 사람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킨 적도 있다

그 순간의 무안함이란,

 

귀중한 물건이라고 잘 보관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찾은 것이 별로 없다

가끔, 궁금하다. 그것들은 대체 어디로 몽땅 사라졌을까

발이 달려 걸어 나갔을 리는 만무하고...

 

곰국을 올려놓고 깜박 잊고 잠들었다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노릇한 연기와  몹시 기분 나쁜 냄새로

꽉 차있는 집안을 잠결에 미친 듯 뛰어다니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그렇듯

한 달이 지나도록 화초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그 이후 곰국을 끓여본 적이 없다

 

희미한 것은 희미한 것들에 끌리나 보다.

이를테면 패랭이꽃처럼 선명한 색의 꽃들이 지천인데

내가 좋아하는 풀꽃들은 하나같이 희미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중에 여뀌,라는 풀꽃이 있다.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흔한 꽃이라 

별로 눈여겨보는 이 없겠지만  정말, 자세히 보면 예쁘다

투박한 항아리에 아무렇게나 몇 가지만 꽂아 놓고 조금 먼발치서

바라보면, 그 은은한 멋이 기대 이상이다

 

가녀린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려 호흡하고 있는

여리여리한 꽃들에 이리도 집착하는 것은,

그늘의 풀 같은 나에 대한 일종의 연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 희미한 모두에게 넌지시 건네는 위로 같은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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