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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56

야생화 사랑은 형체가 없다 잠시 안개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려 현깃증으로 휘청거리게 만드는 것 사랑은 색깔이 없다 분홍 분홍으로 잠시 머물다 암갈색으로 흩어져버리는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아 그저 한 계절을 밟고 왔다가 여러 계절에 뒤섞여 사라지는 것 사랑은 알 수도 없어 이별이라는 뒷모습을 감추고 서성거리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꿈 2024. 10. 8.
어떤, 어떤 수순처럼 차츰 흐려지던 것들가령 왜? 가 끊임없이 솟아 산처럼 쌓이는 일이라던가이맘때쯤이면 하얗게 드러나는 길 옆으로 향긋한 풀내음이 진했다던가시들하게 떨어지는 하루가 모여 수북하다눈 뜨면서 가슴을 짓누르던 돌을 종일 안고 산다돌 같은 내 마음 곧 녹여주소서노래했는데 녹는 돌은 아직 본 적이 없다아, 있었던가 그 돌의 소재는 눈물이었던가한계,라는 거 어디까지 가면 사람들은 포기를 할까침묵으로 닫아걸던 문 안쪽 깊숙이 숨게 되는 걸까물에 덜컥, 밥을 만다 혀끝이 저리다 음식마다 소태다 왜 이렇게 짜 이젠 음식도 못하네 맥을 놓고 있는 내가 마땅치 않다그러려면 차라리 다 놓고 가던가 그게 맘대로 되니악쓰려다 참는다내가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어떤 땐셀 수 없이 많아지다가 거품처럼 꺼지는 나내 허락도 없이.. 2024. 8. 2.
여전히 그렇다 차가운 봄밤이다  아픔도 시간이라는 파도에 깎이다 보면 몽돌처럼 둥글어지는구나어쩌면 위장한 채 꼭꼭 숨어있는 걸까아픔,약간의 불편한 감정의 소모 정도로 읽힌다 3월 초승 몇 날이 지나고거짓말처럼 날이 따뜻해졌다봄의 속성은 늘 그랬다 변덕스러운 여자처럼수다스럽고 시끄러웠다나도 그랬다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시끄럽다가 다시 조용해졌다봄, 다시 추워졌다언제나 반복되는 봄은 늘 그랬다차가운 발등부터 내밀어 보다가닿지 않는 소식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따끔 목젖이 아프다인사의 방식이 여전하다봄은 다시, 봄이다 빈자리마다 햇살은 차오를까 2024. 3. 22.
낙화 5호에서 1호 낯선 집으로 이주한 제라늄 화분 하나 이파리도 자잘한 것이 잎만 무성해서 도무지 꽃 피울 생각이 없는 듯 마치 농사가 잘 된 아욱밭을 보고 있는 듯, 봄이 다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어갈 때 나도 꽃, 드디어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내민다 꽃송이가 너무 작다. 이미 노을빛님 온갖 화려한 제라늄들에 한껏 높아진 눈, 에게 무슨 꽃이 그러냐 이 집 주인만큼이나 초라하네 환영을 못 받은 셈 울 노을빛님 살뜰한 꽃사랑을 생각하며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하필 같은 동에 살고 있는 권사님 집 복도에서 역시 제라늄 족보인 꽃이 잎 테두리가 연한 갈색이고 꽃 또한 예사롭지 않은 얼른 봐도 귀족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다르다 우리 꽃은 이름만 꽃이다. 권사님 은근 자랑이다. 쌀뜻물도 주고 정성을 다 했노라고 그 집은.. 2023. 6. 30.
떠난다 너도, 나도 아주 오랜 시간 유지했던 헤어스타일을 조심스럽게 바꿔 본다 내 변덕에 이렇게 오래 같은 모양의 머리를 고집한 적이 없었다 긴 생머리 난 편하고 좋았지만 나이와도 맞지 않는 거 같고 주변의 반응은 반반 어울리니까 그대로 유지해라와 짧게 커트해라 난 커트해서 만족해 본 적이 없으므로 너무 큰 모험은 피하자 소심한 나는 과감한 쇼트 대신 약간 다듬고 펌(파마)을 했다 신기계까지 도입한 미용실 두피 마사지까지 개운하게 마친 후 드디어 개봉박두 바글바글... 허걱, 라면 머리다 순간 웃음이 나온다. 거울 속에 저거 뭐야 그 머리가 편하기도 했고 타고난 똥손인 내가 접어 묶던지 틀어 올리면 끝나는 거도 좋았었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렇거나 이젠 늦었다 살짝, 불안하다 불안과 우울이 뒷덜미를 .. 2023. 6. 27.
장마가 하는 일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하늘에 거뭇거뭇한 구름이 어지럽게 몰려다니고 우르르르 천둥소리라도 나면 비설거지 한다고 가족들 전체가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당에 널린 땔감들을 치우고 엄마는 빨래를 걷고 후드득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열린 창고 문을 닫고 한참을 부산스러웠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장마는 엘니뇨현상이 겹쳐 비도 많이 올 거라고 겁을 준다 마음이 나도 모르게 조급해진다. 사실 엊그제부터 컨디션도 안 좋고 이 여름에 전기메트를 뜨겁게 해서 허리를 이리저리 지지고 있다 몸은 쉬라고 하는데 마음은 옛날 비설거지 장면이 떠오르며 바삐 뛰어다녀야 할 거 같다 몸이 기억하는 날 요즘, 소금파동으로 난리인데 하필 소금이 없다. 주부로선 실격이다 다행히 잔소리할 누구도 없어서 다행일까 때론 잔소리가 고플.. 2023. 6. 22.
조용한 수다 사람들을 자주 만날 일은 없지만 어쩌다 만나면 난 참 말이 많다 여럿이 모였을 땐 비교적 듣는 쪽이지만 마음 맞는 친구 앞에선 그렇다는 뜻 물론 들어주는 것도 열심이다 늘 겪는 일이지만 수다의 끝엔 허무감만 남는다는 것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설 때 휘몰아치는 공허감 그 외엔 없다 다음엔 말 수를 줄여야지 다짐하지만 별반 달라지는 게 없다 왜 말을 많이 하면 더 쓸쓸해지는 걸까 그렇다고 들어주는 친구가 사람이 가볍거나 내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거나 그런 거도 아닌데 나를 드러내는 일에 있어 내 안에 거부감이 작용한다? 그보다 나 스스로 내 약점을 다 말하면 (사실 그 외엔 주제가 별로 없다) 자신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래, 맞아 끄덕이면서 왜 내게는 적용이 안 되는 걸까 집안일.. 2023. 6. 20.
달우물 달우물 조예린 폭풍이 씻어간 밤하늘이 검은 수정처럼 깨끗하다 바다는 모른다 모른다 하고 흩어진 폐허가 아직 잔설 같다 그 위로 샘물같이 솟아오르는 만월! 찢어진 날개를 물에 적신다 타는 물줄기를 따라 물을 들이킨다 달빛이 얼음보다 차다, 차다! ​ ................................................................................... ​ 폭풍이 깨끗하게 씻어 놓은 밤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달이 길고 연한 은빛 날개를 펼칩니다. 여기저기 찢어져 앙상합니다. 달이 찢어진 날개를 물결 위에 내려놓습니다. 날개가 물에 젖습니다. 날개를 바다 위에 드리우고 물을 들이키는 달은 샘물처럼 깊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시가 더없이 고요합니다. 김 서린.. 2023.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