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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장마가 하는 일

by 후연 2023. 6. 22.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하늘에 거뭇거뭇한 구름이 어지럽게 몰려다니고 
우르르르 천둥소리라도 나면 비설거지 한다고 가족들 전체가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당에 널린 땔감들을 치우고
엄마는 빨래를 걷고 후드득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열린 창고 문을 닫고
한참을 부산스러웠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장마는 엘니뇨현상이 겹쳐 비도 많이 올 거라고 겁을 준다
마음이 나도 모르게 조급해진다. 사실 엊그제부터 컨디션도 안 좋고 
이 여름에 전기메트를 뜨겁게 해서 허리를 이리저리 지지고 있다
몸은 쉬라고 하는데 마음은 옛날 비설거지 장면이 떠오르며
바삐 뛰어다녀야 할 거 같다 몸이 기억하는 날
 
요즘, 소금파동으로 난리인데 하필 소금이 없다. 주부로선 실격이다
다행히 잔소리할 누구도 없어서 다행일까 때론 잔소리가 고플 때도 있다
습관은 못 버려서 장마에 먹을 비상 반찬은 만들어야지 
마음이 급해진다 전화 주문을 해서 몸값이 껑충 뛴 천일염과 오이 배추.. 등등
배달되는 대로 소금물을 끓이고 오이에 붓고 배추를 절이고 
이틀을 동동거렸다. 이젠 진짜 아프다 결과물들은?
 
오이지는 그럭저럭 노르스름 색깔이 나왔고 배추김치는 보기엔 맛깔스러운데 
여름배추는 맛이 없다 재료 탓? 제대로 배추가
안 절었다 가끔  그랬다. 작은애가  김치에서 날배추 냄새난다고
김치는 절임이 생명이다 안 절여지면 제대로 익은 맛을 못 느낀다
그럴 때 김치 맛이 미쳤다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는다 

저 혼자 먹을 걸 안 하면 어떤가 오이지 한 가지만 하던가 묵은지도 가뜩 있고
습관은 무서운 거라고 답한다. 엊그제 칼국수를 먹는데 겉절이가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自己愛에서 시작된다 
것도 어찌 보면 잘하는 일이지만 자신이라도 챙겨야지 그러면서 속으로
암튼 지 생각은 엄청해 꼴에.. 궁시렁
 
난 정말 착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왜 엄마는 나보고 착하다 했을까
것도 그냥 착하다 안 하고 부처 반토막 같다고 반토막은 또 뭐람 이왕이면
온토막이 낫지 그러던 엄마도 내가 몹쓸 병을 앓으면서 성질이 나빠졌다고 
하나밖에 없는 딸 애간장이 녹던 엄마 살이라도 깎아 먹일 듯하다가 
설거지하던 행주를 내동댕이치고 에이, 딸년하고 사는 년들은 다 미친년들이여!
엄마가 아주 거친 말을 던져놓고 휙 나가셨었다
우리는 지독한 애증관계다 죽을 듯이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모든 화풀이를 엄마에게 다 쏟아놓고 온갖 패악질을 해댄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날 사랑해 준 사람은 엄마이고 
나 사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날들도 엄마랑 살던 날들이고 
여름밤 평상에서 엄마 치맛자락을 덮고 부채질로 모기 쫓아줄 때
설풋 들었던 단잠이 제일 맛있었고 
지금도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사람이 엄마다. 왜 비설거지 비상반찬에서 
엄마로 옮겨왔는지 아이들은 이 엄마가 절실할 때가 있었을까
 
녀석들에게 어릴 때 추억 하나씩 꺼내보라 하면 큰 녀석은 엄마가 나보고
이 정신상태가 xx 넘아 이랬지 따지듯이 덤벼들고 
나중에 아이에게 사과는 했지만 그 심한 말은 지금도 후회된다
작은 녀석은 엄마가 로봇 안 사줘서 장난감공장 불났을 때
한쪽 팔 없는 로봇 줏어다 놀았다고
아니 그렇게 없어? 다그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녀석이 고개를 설설 젓는다 딸이 좋지 이래서
혼자 볼멘소리 하다가 저녁 대충 때우고 청승 떨고 있다
엄마가 옆에 있으면 밥 잘 먹고 복 나가게 뭐 하고 있냐고 등짝 스매싱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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