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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수필47

말랑말랑한 오월이 틈을 내준다틈이 있어 햇살이 입맞춤 한오월의 이파리들 윤기가 차르르 하다돌 틈에 민들레 가족이 터를 잡고보도블록 틈에 강아지풀들이 산다틈이 없으면 그냥 지나쳤을햇살, 바람, 비 고루 맛보는 일이다바위틈에 기댄 제비꽃꿈길 환하다.   &.. 난 틈이 있는 사람이 좋다 내 인생에 그런 사람은 단 한번도 없었을까..난 왜 삶이 이렇게 버거울까속된 말로 박복한 건가 2024. 7. 28.
부재 부재  /  채정화   엄마네 집엔지금 엄마가 없다가느스름한 다리로 일어날 때마다 묵묵히 몸 받아내던 벽, 불쑥불쑥 외로울 때마다 밤새 서랍을 여닫고씻어 엎어 놓은 그릇을 다시 씻고작은 뒤척임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천장 엄마네 집엔이젠 엄마가 없다아침이면 서둘러 찾아오던 햇살과무시로 텅 빈 집을 휘둘러 보던 바람만 살고 있다 창밖엔 소리없이 봄꽃 진다. 2024. 5. 7.
나, 나, / 채정화 여직 낯선 내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샅샅이 나를 다 여행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다 덜컹거리며 멈추는 곳마다 자못 처음보는 풍경이어서 어제의 그 자리가 아닌 듯해서 순간 아득해진다 한 뼘씩 늘려가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돌아도 줄지 않는 나, 라는 땅 골치 아픈 땅 분양이라도 해볼까 대문짝만하게 현수막이라도 내걸어 볼까 듬성듬성 박힌 자갈을 골라내고 촘촘한 가시넝쿨만 걷어내도 제법 쓸만한 땅이라고 투자자 모아볼까 도무지, 나도 모르는 낯선 땅덩어리라니, 소문난 길치인 나는 걸핏하면 길을 잃고 망연히 서 있기 일쑤다 2023. 7. 28.
둥글다는 거 둥글다는 거 / 채정화 어느 곳 하나 기울지 않고 느슨했던 선까지 완벽한 곡선이다 흔들렸던, 혹은 흔들릴 뻔했던 그럼에도 기필코 거쳐야만 했었던 너라는 크고 작은 봉우리 하나씩 지날 때마다 표정을 잃고 정물이 되었던 순간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 다는 건, 긴 시간, 미로를 통과한 환희 같은 것이다 지워졌던 순간을 복원한 충만한 기쁨이다 둥글다는 건, 날 세우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 어느 쪽에서 보아도 너그러운 곡선이다 힘껏, 꺾어도 생채기 하나 없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활이다 너와 내가 만들어 가는 풍경이다 별의 심장 같은 숨결이다. 2019. 11. 22.
쟈스민 茶를 마시며 쟈스민 茶를 마시며 / 채정화 살아간다는 건, 한 몸이면서 걸핏하면 안과 바깥의 불일치 마음이란, 쉽게 금가는 유리 같아서 매양 깨진 조각을 퍼즐 맞추듯 맞추는 일 이어붙인 흉터마다 햇살이 금가루를 뿌리면* 상처마다 빛을 입고 번역된 시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생각함에 눈물겹게 아름다운 일 가슴을 가로지른 생각 하나를 茶 한잔에 녹여 마신다 마른 기침처럼 다가와 고요히 풀어놓는 너의 정갈한 혼, 엎질러진 속 깊은 너의 향기에 바스락거리는 마음이 환하게 눈 뜨고 일어나 앉는다. *이수경의 저서 - 번역된 도자기에서 차용 2019. 11. 20.
가을을 앓는 자 가을을 앓는 자 무죄 / 채정화 마른꽃잎 같은 날들 또옥, 떨어지고 물속에 가라앉은 하얀 달 둥글게 파문 짓는 물살 아득한 단애의 끝 간당거리는 *구름체꽃 서걱서걱 제 몸 부딪히며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을 호명하지 않은 아직은 낯선 날들이 두렵기도 해서 흑백 건반위 발을 올리고 위태롭게 서 있는데 서풋서풋 멀어져가는 가을 이 땅위에 영원한 건 없다는 듯, *산토끼풀과에 속한 두해살이 풀 솔체꽃으로도 불리는 청보랏빛 꽃 ....손톱이 아프다 세상에 손톱이 다 아프냐 손톱을 깎다가 엄지 손톱이 썩은 초가지붕처럼 폭삭 내려앉는 걸 보았다 언젠가 현관문 틈에 끼어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날짜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소리없이 웅크리고 있던 묵은 아픔이 절규한다 나 좀 봐달라고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고 손톱이 까맣게.. 2019. 11. 10.
그해 봄은, 봄이 아프다 그해 봄, 폭죽처럼 꽃망울 터지고 가지마다 연둣빛 생명이 눈뜰 때 차라리 나는, 영원히 눈을 감고 싶었다 회진을 끝내고 돌아서는 의사를 붙잡고 선생님, 우리 딸 좀 고쳐줘요! 젊디젊은 것이 어쩌면 좋대요……. 애먼 의사 고개만 끄덕이다 사라진 병실 복도 끝에 넋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 계시던 엄마 절인 배춧잎 같은 딸에게 노오란 씀바귀 꽃을 머리에 꽂아주시며 우리 딸 고웁다. 눈가에 이슬맺히던 엄마 딸의 시한부 판정 앞에서 그래, 이렇게 아픈 것보다 하늘나라가 낫다 돌아서다 무릎 꺾여 한참을 못 일어나시던 당신, 기적처럼 수십 년을 끄떡없이 살아낸 건 당신 목숨과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대한 신의 답례 같은 거였다 암,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귀도 밝고 눈도 밝으시지 병실 바닥에서 쪽잠 자며 .. 2019. 4. 2.
깊은 밤엔 하늘도 운다 깊은 밤엔 하늘도 운다 / 채정화 뭔가를 끊임없이 찾고 찾으며 젖은 안개 숲을 헤매고 다녔다 등 떠밀리 듯 길 위에서 하루가 가고 밤의 고단한 날개를 접었다 어쩌면, 그것은 끝내 잡을 수 없는 흔들림으로 겨우 감지할 수 있는 바람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 같은 건지도....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울린다 이럴 때는 정처없는 길 위로 또 다시 나설 것이고 한 가닥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텅 빈 가슴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깊은 밤에 검은 산그림자를 보면 눈물이 쏟아진다 하늘과 맞닿은 경계선마저 흐릿해서 그 간격이 뿌연 눈물로 가득차 있는 듯 보인다 난 가끔, 하늘이 산마루에 얼굴을 묻고 우는 모습을 본다 검푸르스름한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서럽게 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 2019.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