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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낙화

by 후연 2023. 6. 30.

 
 
 
 
5호에서 1호 낯선 집으로 이주한 제라늄 화분 하나 
이파리도 자잘한 것이 잎만 무성해서 도무지 꽃 피울 생각이 없는 듯
마치 농사가 잘 된 아욱밭을 보고 있는 듯, 봄이 다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어갈 때
나도 꽃, 드디어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내민다 꽃송이가 너무 작다.
이미 노을빛님 온갖 화려한 제라늄들에 한껏 높아진 눈, 
에게 무슨 꽃이 그러냐  이 집 주인만큼이나 초라하네 환영을 못 받은 셈
 
울 노을빛님 살뜰한 꽃사랑을 생각하며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하필 같은 동에 살고 있는 권사님 집 복도에서 역시 제라늄 족보인 꽃이 
잎 테두리가 연한 갈색이고 꽃 또한 예사롭지 않은 얼른 봐도 귀족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다르다
우리 꽃은 이름만 꽃이다. 권사님 은근 자랑이다. 쌀뜻물도 주고 정성을 다 했노라고
그 집은 아파트 바깥 복도이고 우리는 베란다라서 정성 보다 환경? 아닐까
 
쌀을 씻다가 참 쌀뜨물 받아야지 두어 번 줬더니 다른 지인이 또 그런다 여름엔 
자칫하면 벌레 생긴다고 아, 어쩌란 말이냐 *노을빛님 : 성공적으로 제라늄 정원을 가꾸는 어여쁜 손
좀 물어볼 걸 그랬나 아 본 건 있어서 바람 통하라고 수북한 이파리들도 많이 솎았다 
그 후 놀라운 일이 생겼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꽃대궁 예서제서 불쑥불쑥 
대답이라도 하듯이 솟아난다. 어찌 보면 그래 까짓 거 보여주지 오기가 가득해 보이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나도 꽃 같은 꽃을 보게 된 셈이었다 
 
피었나 하면 서둘러 지던 꽃들이  마지막을 알았는지
나중에 피는 꽃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 아이들이 다 필 때까지 
안간힘으로 붉은빛을 발하고 있다. 이럴 땐 이 아이들도 마치 魂이 있는 거 같다
5일 정도를 버티더니 점차 꽃 끄트머리가 마른다. 한 잎 두 잎 진다
전문가 노을빛님을 절대 못 따라 하는 거 너무 많지만, 그중 시들어가는 꽃 톡, 톡 잘라주는 거
안락사 같은 그것이 덜 고통스러운 걸까. 그래도 모가지 톡 못 자르겠다 
 
쓸쓸히 바닥에 즐비한 꽃들의 주검을 보며 
문득, 드는 생각 오히려 지금 할 말이 많아 보인다는, 가득히 고인 수많은 말을
품고 말없이 떠나는 꽃,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때
눈 맞춤도 하고 너 지금 무슨 생각해? 물어도 보고 할껄 왜 관심을 주지 못 했을까
아픈 덴 없어? 왜 오랜 시간 그렇게 소식이 없었어? 걱정했잖아 꽁꽁 봉인한 입
젖은 눈은 끝내 외면했을까
 
이별은 예고가 없다.어느 날 갑자기 햇빛 속 소나기처럼 불쑥, 찾아온다
모든 이별은 면면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꽃은 꽃이어서 잎은 잎이어서  자기변명만 빼곡하다 
꿈속 같은 실체가 불투명한 만남도 이별만큼은 선명하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이해는 난해하니 
오직 믿음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해
말해준다. 들었니 말없이 깜박이는 눈, 모호하다 
하지만 익숙한 표정이다 늘 그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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