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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산책

지슬

by 후연 2023. 6. 28.

 

 

 

 

지슬* 

 

 

  강영은
 
 
나는 드디어
말상대를 고안해 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마다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불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이고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어주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
흙무덤에서 파낸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 지슬: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 
 

 

  (제13회 서귀포문학상 당선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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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서귀포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시론』 등.

 

&..

시작은 외롭고 쓸쓸했을 것이나 결국 말 상대를 고안해 낸 

화자는 행복했겠다. 우리는 종종 섬이 될 때가 얼마나 많던가

내가 섬일 때, 이 시어는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온다

물소리로 빗줄기고 뒤덮는 바람이고 고독이어도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찾았으니

때로 위로도 되고 절망도 되는 깊이를 돌아

흙무덤에 묻혔던 지슬을 발견했으니 캐고 캘 것이 있으니

가장 어려운 자신과의 소통의 길이 열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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