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 다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 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 원고지의 힘 /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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