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산책

원고지의 힘

by 후연 2023. 7. 26.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 다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 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 원고지의 힘 / 고영

 

 

 

'시,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이 떠난 뒤로는  (0) 2024.05.17
목련  (0) 2024.04.14
빗방울, 빗방울  (4) 2023.07.24
어떤 일이 일어난 미래  (2) 2023.07.22
여름밤  (10) 202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