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썰다가 / 채정화
서툰 칼질로 감자를 썰다가
그만, 손톱을 썰었다
다행히 손톱에 찰싹 붙어있던 여린 살갗이 무사하다
단단한 껍질인 손톱이
저 날 선 칼날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아찔하다. 온몸에 소름 돋는다
딱딱한 손톱을 거침없이 자른 칼날이
말캉한 살갗 앞에서 어떻게 멈출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라고 급하게 뇌가 명령했을까
놀란 가슴으로 다시 들여다본다
손톱이 절반가량 수직으로 깊숙이 잘려나갔다
보고 또 보아도 놀랍다
모든 역할과 기능을 묵묵히 수행하는
내 몸을 지키는 가련한 것들의 수고가 새삼 눈물겹다
칼날이 춤추는 섬뜩한 세상
벼랑 끝 절망의 늪에 빠질 때마다
힘껏 끌어안아 주는 또 하나의 나,
왼쪽 어깨가 아프면
오른손의 체온이 아픈 어깨를 감싼다
혼자인 듯
난 혼자가 아니다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을 압화해두 듯
의미있는 뭔가를 남겨야될 거 같은 초조함에
쫒길 때 있다
책을 집어들고 작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춤추며 미끄러지는 언어에 취해 있는 것도 잠시
내 몸이 거부한다 멍하게 하루를 떼우는 쪽으로 등떠미는 거다
30분도 채 안 되어 침침해지는 눈
뒤이어 따라붙는 편두통
마치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나의 남은 몫인 듯
책을 놓게 만든다
그나마 간간 책이라도 읽어야 내 안에
돌처럼 구르고 있는 이 무거운 현실을 조금씩 밀어낼 수 있는데
것도 내겐 사치라는 듯
용납하지 않는 현실이다
난 녹슬어가고 그저 생존을 위해 먹고, 자고..
자는 것조차 내겐 어렵기 짝이 없지만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는
여전히 이런 나를 탓하지 않고
함께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