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작시, 수필

감자를 썰다가

by 후연 2018. 10. 5.

 

 

감자를 썰다가  /  채정화

 

서툰 칼질로 감자를 썰다가
그만, 손톱을 썰었다 
다행히 손톱에 찰싹 붙어있던 여린 살갗이 무사하다

단단한 껍질인 손톱이
저 날 선 칼날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아찔하다. 온몸에 소름 돋는다

 

딱딱한 손톱을 거침없이 자른 칼날이

말캉한 살갗 앞에서 어떻게 멈출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라고 급하게 뇌가 명령했을까

 

놀란 가슴으로 다시 들여다본다
손톱이 절반가량 수직으로 깊숙이 잘려나갔다
보고 또 보아도 놀랍다

 

모든 역할과 기능을 묵묵히 수행하는 

내 몸을 지키는 가련한 것들의 수고가 새삼 눈물겹다


칼날이 춤추는 섬뜩한 세상

벼랑 끝 절망의 늪에 빠질 때마다

힘껏 끌어안아 주는 또 하나의 나, 


왼쪽 어깨가 아프면

오른손의 체온이 아픈 어깨를 감싼다

혼자인 듯

난 혼자가 아니다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을 압화해두 듯

의미있는 뭔가를 남겨야될 거 같은 초조함에

쫒길 때 있다

 

책을 집어들고 작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춤추며 미끄러지는 언어에 취해 있는 것도 잠시

내 몸이 거부한다 멍하게 하루를 떼우는 쪽으로 등떠미는 거다

30분도 채 안 되어 침침해지는 눈

뒤이어 따라붙는 편두통

 

마치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나의 남은 몫인 듯

책을 놓게 만든다

그나마 간간 책이라도 읽어야 내 안에

돌처럼 구르고 있는 이 무거운 현실을 조금씩 밀어낼 수 있는데

것도 내겐 사치라는 듯

용납하지 않는 현실이다

난 녹슬어가고 그저 생존을 위해 먹고, 자고..

자는 것조차 내겐 어렵기 짝이 없지만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는

여전히 이런 나를 탓하지 않고

함께 머물고 있다  

 

 

 

 

 

 

 

'자작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립고, 그립다  (0) 2018.11.16
  (0) 2018.11.02
마늘을 찧다가  (0) 2018.11.02
은화과  (0) 2018.10.05
우물  (0) 2018.10.05